입학-휴학(군대)-배낭여행·어학연수-복학-휴학(인턴)-복학-취업준비. 대한민국에서 20대의 삶은 단순해졌다. 고민과 외침도 한 줄로 요약된다. ‘취업을 향한 돌진’이다. 저마다 이력서에 휴학과 복학이 어지럽게 뒤섞이는 이유다. ‘취업’은 이제 20대의 모든 것을 규율하고 지배하는 단어가 됐다.


    

박성민씨(27·서강대)는 “탈락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틀어쥐고 있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남들 피아노 학원 가면 가야 하고, 과외 받으면 따라가야 했다. 스스로 ‘그룹’ 안에 포함돼 있어야 하고, 주류 안에 있다고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성균관대 퇴계인문관 스터디룸에서 박윤아(22·경제학과 4년)·박지성(27·영문과 졸)·장수현(23·신방과 대학원)·은정진(25·신방과 졸·왼쪽부터)씨가 취업 준비 모임을 갖고 있다. 20대의 생활·놀이 문화를 보여주듯 각자의 지갑 속에 5~7장의 카드를 갖고 있고 이동통신사·극장·커피전문점 카드 등 겹치는 것이 많았다. 김정근기자  

1987년 최고 인기 영화는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였다. 하지만 2009년의 ‘청춘’은 사치다. 박씨는 “즐기는 것도 좋지만 생존이 더 절박하다”고 잘랐다. 취업에 실패하면 ‘나락’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학기와 방학마다 취업 전선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똑같은 속도 경쟁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박씨는 “기업 면접때 자기소개서에 쓴 휴학·공백 기간을 꼼꼼하게 따져 묻는다”며 “20대의 10년 인생에 ‘여백’ 한 조각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취업 몰입’은 남들이 하는 것은 다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고, 모두가 다른 듯 똑같은 삶을 살게 만든다. ‘취업 불안’과 ‘탈락의 두려움’이 20대를 관통하는 복제 코드가 된 것이다.



서강대 수학과에 재학 중인 이재철씨(25)도 “2003년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쉼표 한 번 없이 달려온 느낌”이라고 말한다. 이씨는 입학하자마자 합창단·마술·봉사·천체관측 등 동아리 활동 4개를 거쳤다. 2학년 때는 물리학을 복수전공하고 2학기에 군에 입대했다. 제대한 뒤 건설 현장에서 이른바 ‘노가다’를 했고 땀 흘린 돈으로 40일짜리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2007년 복학 후엔 다시 취업과의 전쟁. 복수전공을 경제학으로 바꿨고,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몰래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었다. 지금은 학원 아르바이트도 끊고 취업에 매진 중이다. 취업 관련 스터디가 1주일에 3개씩 잡혀 있고 지난 여름방학 때는 은행자산관리사 자격증도 땄다.

이씨는 “7년 동안 바쁘게 살아왔는데도 모자란 게 너무 많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방학 때마다 한자공인 시험과 일본어JPT, CPA(공인회계사)·CFA(공인재무분석사)·AFPK(공인재무설계사)·FRM(재무위험관리사)·보험계리사 등 금융 자격증을 하나씩 따는 친구도 있다”고 했다. 혹시 뒤처질까봐 긴장을 풀지 못하는 취업전쟁의 단면이다.

손연순씨(27·여·가톨릭대 졸)는 4년 다니고 대학을 졸업한 ‘희귀 인간’이다. 동아리·학회 활동을 하면서 배낭여행이나 어학연수는 다녀오지 않았다. 손씨는 ‘남들처럼 하지 않은 것’이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 거라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현재 유명 여론조사기관에서 일하는 그는 내년에 퇴사한 뒤 어학연수를 다녀올 계획을 세우고 있다. 손씨는 “다녀오는 게 낫다”고 맘을 다잡은 상태다.






인생을 취업에 저당잡힌 20대의 욕망과 삶은 자연스럽게 비슷한 색깔이 됐다.

신수연씨(23·서울대 졸)는 “마땅히 놀러갈 곳이 없다”고 말했다. 신씨가 꼽은 일상적인 놀이장소는 술집·노래방·게임방·PC방·커피숍 5개다. 여기에 MT(야유회)와 가까운 놀이공원이 가끔 접하는 ‘양념’으로 따라붙었다. 신씨는 “20대는 상업적인 문화에 길들여져 있다”며 “엄마는 콩나물 100원 아끼는데 애들은 빕스(패밀리 레스토랑의 일종) 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대학 재학시 ‘인턴’이 필수처럼 여겨지면서 직장인 문화가 대학생활에 깊이 침투했고 배낭여행과 어학연수가 보편화되면서 미국식 문화생활도 놀이문화로 자리잡았다.

박성민씨는 “요즘에 소폭(맥주에 소주를 섞은 폭탄주)을 많이 마신다. 다들 어디선가 인턴생활을 하며 술 문화를 배워 왔다”고 말했다. 방송사 계약직 일을 그만두고 다시 취업준비에 나선 김선혜씨(28·여·숙명여대 졸)도 “지금은 소폭을 꽤 즐기게 됐다”며 “언론사 인턴 일을 하면서 배웠다”고 말했다. 각자 술과 음식을 한 가지씩 싸 들고 와 집에서 모여 노는 ‘팟 럭(Pot luck)’ 파티도 20대의 놀이문화로 매김되었다.

미팅과 소개팅도 판에 박은 듯 닮았다. ‘효율’이 ‘개성’에 앞선다.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종화씨(27·홍익대)는 “소개팅은 학벌과 키 등 객관적 데이터가 우선된다. 커피숍과 식사, 간단한 술자리로 이어지는 패턴도 똑같다”고 말했다. 이재철씨는 “미팅은 3 대 3이 정석이다. 예전처럼 ‘파트너 정하기’는 없다. 같이 놀고 나중에 집에 갈 때 관심있는 상대방 연락처를 알아간다. 운보다 개인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식”이라고 말했다.

2009년 우리 사회의 청춘들은 스스로를 ‘복제인간’이라고 규정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이종화씨는 “직업과 연봉이 성공의 기준이 돼 버렸다”며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위험해 보이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선혜씨는 “우리 모두가 1등이 되겠다고 이러는 게 아니다”라고 꼬집었다. 김씨는 “한국은 평범하게 살아야 사람답다고 인정해 주는 사회”라며 “1등 강박증이 아니라 중간 강박증의 사회다. ‘중간도 못 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우리 모두를 똑같이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신수연씨는 “문제의식을 느끼지만 굳이 이 패턴에 역행하는 삶을 살기는 싫다”며 “나도 수많은 ‘복제인간’ 중 한 명”이라고 말했다.

20대 진보논객 한윤형씨(26)는 “취업에 몰입돼 다른 욕망을 가져 본 경험이 없는 20대의 장래희망이 ‘사원증 목에 걸고 점심시간에 스타벅스 커피를 고고하게 마시는 이미지’로 치환돼 버렸다”며 “문화·예술·환경 등의 차원에서 다른 삶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시민사회 진영이 제공할 수 있어야 20대가 숨을 쉴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