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집안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명문가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이 넘고, 독립유공자 훈장을 탄 사람도 10명이 넘는다. 안 의사의 업적과 가문이 빛난 만큼 가족의 어려움은 컸다. 그림자도 짙었다.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유언을 받았던 동생인 정근(1885~1949)과 공근(1889~1940)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정근은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고,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내무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광복된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1949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근의 차녀 미생은 백범 김구 주석의 큰아들 인과 결혼했다. 인은 광복 5개월 전 폐병으로 사망했다. 미생은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갔고, 이후 집안과 연락이 끊겼다.






안 의사의 막내 동생 공근은 김구 주석의 최측근이었다. 이봉창·윤봉길 의사가 선서를 하고 사진을 찍은 곳이 공근의 집이었다. 1933년에는 김구 주석과 함께 장제스 국민당 총통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1939년 백범의 신임을 잃은 직후 충칭에서 행방불명됐다. 안 의사와 마찬가지로 정근과 공근의 유해도 찾지 못하고 있다.

광복 후에도 안 의사 집안은 가난과 탄압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정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구 선생 계열에서 활동하던 안 의사 집안은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고 박해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민주구국동지회'에서 활동하다 박정희 정권에서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통일운동을 하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안 의사 아들, 일제 선전도구로 이용돼

안 의사 직계 가족들의 과거는 더 아프고 어두웠다. 안 의사 가족들은 일제의 눈을 피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코르지포, 중국 길림성 무링(목릉)현, 러시아 니톨리스크, 중국 상하이 등으로 떠돌아다녀야 했다. 안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1946년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졌다. 안 의사가 신부로 키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큰아들 분도(1905~1911)는 1911년 지린성 무림현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일본 밀정에게 독살됐다는 설이 제기됐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둘째아들 준생(1907~1952)은 중국 상하이 식당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다. 마약 장사를 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1939년 10월 준생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현 서울 신라호텔 자리)를 찾아 분향했다. 또 이토의 아들 이토 분기치(일본광업 사장)를 만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치밀한 각본대로 연출된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라며 대서특필했다. 언론은 준생이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후에 일본은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준생을 특별 관리했다.

1945년 장제스와의 회담에서 김구 주석은 "안중근 자식이 일본에 항복하여 상하이에서 여러 가지 불법행위를 하며 아편을 매매하므로 실로 유감이다. 직접 명령을 내려 안준생을 구금해주기 바란다"라고 말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김구 주석은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하여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리에게 말하기도 했다.

1950년 귀국한 준생은 1952년 피란 도중 부산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부인 정옥녀씨와 1남2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권위자가 됐다.





장녀 현생(1902~1959)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1909년 어머니가 두 아들만 데리고 망명하자, 현생은 프랑스 신부의 보호 아래 서울 명동의 수녀원에서 지냈다. 1914년 13세가 돼서야 현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족과 합류했다. 19세가 되던 1919년 안 의사 가족은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로 이사했고, 여기서 현생은 불문학을 공부한다. 1941년 3월26일 현생은 남편 황일청과 박문사를 참배하고 아버지의 죄를 사죄했다. 현생 부부도 일본의 특별 관리를 받았다.

1946년 현생은 서울로 돌아왔고, 한국전쟁 당시 대구 효성여대에서 프랑스어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서울에서 궁핍하게 생활하다 1959년 서울 북아현동 집에서 고혈압으로 숨졌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일 사무총장은 "안 의사 유족은 광복된 후에도 미국·파나마·독일·북한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다. 불우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사는 독립운동 역사의 한 단면이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