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한국전쟁 겪으면서 행정기록 소멸

동장 도움으로 호적 회복…"혼자 투표하겠다"

 

6.2 지방선거에서 여든여섯 평생에 처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선거권을 행사하게 된 할머니가 있어 화제를 낳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굴곡진 역사를 겪으면서 출생 신고, 혼인신고를 할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평생 살아오다 지난해 말 처음으로 호적과 주민등록을 갖게 됐기 때문이다.

23일 서울 성북구에 따르면 석관동에 사는 이경순(86) 할머니는 다음달 2일 지방선거에서 난생처음 투표를 한다.

평생 행정기록상 아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온 이 할머니는 주민등록증이 없어 병원이나 은행에 가본 일도 없었고 수십년간 투표는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다.

가족도 없이 파지를 모아 생계를 이어온 할머니를 딱하게 여긴 동네 미용실 원장은 할머니를 도우려다 주민등록과 호적이 없어 그동안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오춘규(58) 석관동장은 할머니가 어렴풋하게 기억하는 어릴 적 고향인 전남 보성군에 수소문해 연고자를 찾아나섰지만 아무런 실마리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 새 호적을 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오 동장은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을 드나들면서 '한양이씨(漢陽李氏)'라는 성본을 받아왔다.

가족관계등록부와 주민등록에도 등재하고 국민기초수급자 혜택을 받도록 도왔다.

이 과정에서 이 할머니의 안타까운 사연이 주변에 알려졌다.

전남의 한 해안가에서 태어나 16세에 시집간 이 할머니는 결혼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남편이 일본군에 강제 징용되는 바람에 혼자가 됐다.

이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를 알 길이 없고 친정에 다시 돌아갈 형편도 못 돼 전국을 떠돌면서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해 주며 생계를 이어왔다.

지금도 일주일 내내 동네를 다니면서 손수레에 파지를 한가득 채우면 고물상에서 2천∼3천원을 받는데 이게 손에 쥐는 돈 전부다. 그나마 지난해 12월부터는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돼 월 40만원이 나온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집을 찾은 기자에게 주민등록증을 내보이면서 "선거날 혼자 투표하러 가겠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한글과 숫자를 읽을 줄 모르지만 86년 만에 갖게 된 소중한 주민등록증이기에 통장, 도장 등 잘 간직해야 하는 물건과 함께 가방에 넣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오춘규 동장은 "30여년간 일하면서 이런 분을 만난 건 처음"이라며 "아무런 혜택도 못 받고 살아오셨는데 이제라도 아픈 데가 있으면 병원도 자유롭게 다니시고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