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만 훔쳐가지 말고 정책도 훔쳐가라




비판적 지지의 망령! 운동권 선배들이 자주 쓰는 말이다. 1987년부터 시작됐다는 이 논쟁의 역사에 대해 어린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내 경험으로 아는 것들이 있다. 2002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는 100만표에 살짝 못 미치는 득표를 했지만 이 미약한 정치적 자산은 2004년 15%의 정당지지율과 국회의원 10석 확보라는 결과로 발전했다. 2004년 화려하게 원내 진출한 민주노동당의 활동엔 아쉬움이 많았고 이는 2007년 대선에서의 참패로 결론지어졌다. 진보정당의 지지자들은 이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죽은 표’는 없다. 다만 당신의 표가 ‘죽은’ 것이라 주장하는 야바위가 존재할 뿐이다.

“선거란 최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선, 혹은 차악을 택하는 것”이라며 충고하는 태도는 얼마나 웃긴가.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정당을 선택할 수 없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올바르다. 문제는 그렇게 타협하여 선택한 정당이 소수정당일 수도 있다는 거다. 진보신당은 내게 차선 혹은 차악의 정당이다. 그 선택의 결과를 무시할 것인가.

소위 촛불시민들의 의중은 ‘무조건 민주당으로 대동단결’은 아니다. 다만 국민이 진보이며 민주주의이니, 너희는 한나라당을 이기기 위해 단결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진보신당을 재수없어하는 이유는 이들이 “내가 민주당보다 더 민주적이고 능력있다”고 잘난 척을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잘난 척’이 싫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래도 노회찬·심상정의 정책공약이 최고평점을 받는데 잘난 척 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도대체 왜 한나라당, 민주당보다 잘난 공약을 내도 먹히지 않는 건지 같이 고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부분을 무시한다면 그들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야권 단일화’ 논의는 민주당에만 유리할 수밖에 없는 거다.

“민주당이 한나라당보다는 진보적이지 않은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의 차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2002년 대선공약에서 나름 진취적이던 민주당이 참여정부 집권 이후 보수화된 과정을 보라. 그리고 한나라당과 조·중·동이 그 ‘보수화’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반기업 정서를 지닌 친북세력’이라 비판했다는 사실을 보라. 그래서 그들은 보수화한 민주당보다도 훨씬 더 오른쪽으로 달려가고야 말았다. 그게 오늘날 이명박 정부의 정책노선이다. 그런 연유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가 여전히 엄연하다. 그런데 민주당이 오른쪽으로 달려가고 그래서 한나라당이 오른쪽으로 달려가도 민주당을 지지해야 한다면, 우리는 한국사회가 얼마나 더 오른쪽으로 향하는 것을 감내해야 할까?

나는 ‘사표론’이 “진보개혁세력의 강세 정당이 가지는 기본권리”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결선투표제도 없고 비례대표 비율도 높지 않은 한국사회에서 ‘소신대로 찍을 것인지’ 혹은 ‘되어선 안될 후보를 비토하는 표를 행사할지’의 문제가 쉽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유시민이나 한명숙 같은 후보가 진보정당의 표를 ‘훔쳐가는’ 것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겠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표만 훔쳐가지 말고 정책도 훔쳐가시라. 진보정당의 잘 짜여진 복지정책을 훔쳐가서 마음껏 활용하시라. 그러면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대항마가 될 수 있고, 정치구도는 변할 거다. 그렇게만 하면 결국 진보정당도 힘을 얻게 될 거다. 언제나 선거 때는 진보정당의 정책을 가져가는 당신들, 제발 이번만은 그대로 실천해 주시라.


- 경향신문 칼럼 -   한윤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