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삭인 23살 딸…태아도 숨져
“뭔 죄를 지었다고 총을 쏴서…”
‘청문회’ 증언뒤 가족들 시달려




최미애(당시 23), 1980년 5월21일 8개월짜리 아들에 이어 둘째를 가져 만삭이었던 그는 전남대 부근의 집을 나섰다. 그날 아침 제자들이 걱정된다며 휴교령 상태인 학교에 나간 남편(전남고 영어교사)이 들어오겠다던 점심때가 넘도록 소식이 없어 마중을 나간 참이었다.

그순간 전남대 앞에서는 시위대와 계엄군의 교전이 한창이었다. 시위대는 계엄군을 향해 ‘짱돌’을 던졌고 계엄군은 공포탄을 쏘다가 M16을 들어 응사했다. 총에 맞은 학생을 군인 2명이 다리를 하나씩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경악한 시민들이 학생을 놓아 달라고 외쳤다. 그러자 군인 하나가 한쪽 다리를 땅에 대고 ‘앉아쏴’ 자세를 취했다. 가늠쇠 안에 표적이 들어왔다.

연이은 총소리에 놀라 집 옥상으로 올라가 거리를 살피고 있던 이웃 연탄집 주인은 또 한발의 총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서 남색 바탕에 붉은 무늬 임부복을 입은 옆집 아기엄마가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총을 쏜 군인은 천천히 자세를 풀고 있었다. 바로 최미애였다.

딸네 집 근처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던 어머니 김현녀(당시 50)는 딸이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순간 허물어지듯 쓰러지고 말았다. 딸의 주검에는 피가 흥건했고, 처참하게 깨진 두개골 사이에서는 뇌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벌써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어미의 몸속에서 8개월 된 태아가 거센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구급차를 수소문했건만 소용이 없었다.

주검까지 뺏어간다는 소리에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관은 가까스로 구했으나 공동묘지까지 싣고 갈 차를 구할 길이 없었다. 연탄 수레를 빌려 관을 종이로 덮은 채 길을 나섰다. 외곽 길목에서 봉쇄하고 있던 계엄군들이 총을 겨누며 가로막았다. 길을 돌려 다른 공동묘지 한귀퉁이에 일단 임시매장을 해야 했다. 그런데 항쟁 진압 뒤 6월10일께 계엄사에서 ‘임신부가 죽었다’는 소문을 확인하려면 검시를 해야 한다며 주검을 다시 파오라고 명령했다. 거부하면 ‘유언비어 날포죄’로 집어넣겠다고 협박했다. 그렇게 18일 만에 다시 파헤쳐진 딸의 주검은 검시 뒤 망월동에 묻혔다.

김현녀는 88년 국회 5공화국특별위원회 ‘광주청문회’에 나와 딸과 손자를 한꺼번에 잃은 ‘애끊는 한’을 쏟아냈다. “우리 딸이 임신을 해갖고 총에 맞았는디, 죽은 사람은 있는디 왜 죽인 사람은 없는 것이오? 세상에 나와 보도 못하고 죽은 내 손자는 어쩔 것이냔 말이오? 세상에 임신한 사람인 줄 뻔히 알면서도 총을 쏘는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이 어딨냔 말이오? 뭔 죄가 있어서, 뭔 죄를 지었다고 총을 쏴서….”
그는 ‘광주의 진실’을 이제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광주청문회는 지난날 정권에 의해 은폐되었던 학살사건의 단면을 드러냈을 뿐, ‘5·18’의 진상은 끝내 밝히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문회 증언을 하고 난 뒤, 남편 최길동(당시 전남 장성남중 서무과장)은 익명의 협박전화를 계속 받았다. ‘신상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이처럼 5월 유가족들의 한은 풀리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광주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정권의 유가족에 대한 탄압은 매우 일상적으로 자행됐다. 생존권 침해, 감시와 사찰, 폭행과 구금을 비롯해 강제납치, 연금과 격리 등등, 그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광주사태’가 ‘5·18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국가보안법과 집시법의 족쇄를 감내하며 진실을 알리는 ‘제2의 항쟁’을 벌였다.

97년 광주시 북구 운정동에 새로 단장된 ‘5·18민주묘지’로 옮기면서 최미애의 주검은 비로소 수습됐다. 여덟 조각으로 갈라진 두개골과 두 조각 난 턱, 전두부에서 후두 부근을 관통당한 ‘그날’의 참상이 고스란히 떠올라 김현녀는 그후 오래도록 또 앓았다.

‘왜 무고한 내 딸이 죽어야 했는지’ 이유만이라도 알고 싶어 미친 듯 쫓아다닌 지 30년. 이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칠 힘도 남아 있지 않다. 흘러버린 세월 탓인지 ‘금세 때려 죽이고만 싶었던 총 든 자들에 대한 미움도 가시고, 학살의 원흉들에게도 미움이 남아 있지 않다.’
팔순의 노모는 이제 눈을 감은 딸과 살고자 발버둥쳤던 그 어린 손자의 넋이 편히 잠들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