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TV에서 패널리스트와 다툰 김대중
김대중 대통령의 오열이 이날을 예견했던가
10년 동안 영어를 배웠지만 정작 써 먹을 영어회화는 도통 하지 못 했다.
카셋 테이프도 장만했지만 제대로 한번도 듣거나 흉내 내지도 못 했다.
정성 들여 배워보자는 성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절실한 필요를 못 느껴서 이기도 했든 것 같다.
무역회사를 하면서 필요한 문통(文通)은 타이핑한 서신으로 하면 별 문제도 없었고
거래처인 미국으로 간대서 꼭 유창하게 지꺼릴 줄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대로 사업을 끌고 나갔다….
방망이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 맞는 충격 같은 사건을 맞았다.
그러니까
1979년 12.12 사건을 이르키고 군부를 동원하여 박정희대통령의 유고를 계기로
5공 군사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장군에 의해서 내란죄라는 황당한 죄명을 씌워
사형수가 된 정치인 김대중(金大中)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상고출신으로 영어를 제대로 배운다는 건 어림도 없는 실정이었다.
더욱이나 대학을 제대로 나온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고 영어를 써야 하는 그런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직업 정치인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내란죄로 사형수 딱지가 붙은 김대중이었다.
그런 그가 전 세계의 정치적인 인사들의 탄원에 의해서 일단은 사형을 면하고
미국으로 망명(추방?)하게 된 것이 아마도 82년도이었든가 싶다.
내가 미국에 가 있었든 84년도인 것 같다.
미국의 ABC TV 방송의 한국의 민주정치에 대한 시사토론(?)… ~
한국의 반정부 대표자격인 망명중인 김대중(金大中)과 한국 정부측의 인사가 ABC 패널의 사회로
토론하도록 짜여 있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정부 측 인사가 불참하게 되었다.
자연히 이 방송프로가 취소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김대중의 끈질긴 주장으로
패널과 김대중만으로 토론하게 되었다.
불안하게 화면을 주시했다.
김대중이가 미국인인 패널과 영어로 토론을 한다?
통역도 없이 말이다.
우리들이 배웠든 영국식 발음에다 일본식 회화…
어설픈 영어에 상대가 없는 민주화 토론……..
패널은 대충 대충 때워 넘어가려 했지만 입술 가에 묻은 게거품도 아랑곳 않고 패널을 몰아
부치는 김대중의 열띤 한 시간 동안의 브로큰 잉글리쉬~
내가 김대중에게 어눌하면서 능란한 영어에 놀라고 그리고 뒤통수를 몽둥이로 갈겨 맞은듯한
충격이 너무도 컸든 그때의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방송 다음 날 나온 조간신문에 김대중의 사진이 실리고 그가 열띠게 주창한 한국의 민주정치에
미국 각계의 관심이 실렸다.
미국 정계의 후원을 얻은 것도 이때가 아닌가 싶다.
김대중의 수기를 보니 영어를 40대인 국회의원 시절에 혼자 공부했다는 것~
40대 중반인 내가 미국 출장에서 돌아 오자 마자 회화 책과 카ㅅㅔㅌ을 사서 제법 한다고 해
보았지만 결국 나는 범인(凡人)의 카테고리를 넘지 못하고 말았다.
존경하는 거목~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를 너무도 아파하는 사유가 있기에 다시금 추도하는 마음으로 적어 본다.
- 글 / 日光 -